나비부인과 사쿠라(さくら) 음악이야기

에도시대 일본에서 쓰인 곡으로 추정되고 있는 노래 '사쿠라'는 동아시아권의 전형적인 5음 음계를 통해 누가 들어도 "아 이거 일본 노래구나"라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곡이 쟈코모 푸치니(1858-1924)의 오페라 나비부인에서도 나온답니다(영상 25분 10초부터).
일본을 배경으로 한 것이니 이렇게 실제 존재하는 곡을 쓰는 것이 지금 영화를 즐겨보는 현대 시대 사람들에게는 당연하게 느껴지겠지만 이런 식으로 원래 존재하는 민요 등을 가져다 쓰는 것은 당시 막 시작한 경향 중의 하나로 꽤나 신선한 것이었습니다. 원래는 내셔널리즘 오페라 쪽에서 자기 나라의 민요를 넣는 것이 먼저였지만 이렇게 동양의 민요를 넣는 시도는 아마 처음이었을 겁니다. 푸치니는 사쿠라 이외에도 이 오페라에서 기미가요, 에치고지시 등 여러 일본 곡들을 사용하고 있는데요, 이런 자료들을 사용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일본에서 편찬된 전통곡조 모음집을 오스트리아 작곡가 루돌프 디트리히(1861-1919)가 일본에서 일할 때(동경예술대학의 첫 음악감독이었음) 구해 피아노 연주용으로 편곡한 것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디트리히의 사쿠라는 이렇게 생겼습니다.
원곡의 멜로디는 그대로 가져가고 있지만 서양식 화성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동서양의 음악이 짬뽕된 느낌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푸치니의 나비부인에서는 음악이 크게 세 종류로 나타납니다. 일본풍, 서양풍, 그리고 짬뽕풍(...).

 이 오페라를 뮤지컬 버전으로 어레인지 한 것이 미스 사이공입니다만 미스 사이공에서는 이 정도로 음악적인 노력을 들여 동서양의 음악적인 결합을 나타내지는 않습니다. 짬뽕을 만들기는 생각보다 어렵기도 하고 나비부인이 만들어지던 당시 서양은 자포네스크에 빠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시도가 가능했지만 베트남 문화에 빠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

 음...조사한 내용은 여기까지지만 나비부인의 플롯을 모르는 분들을 위해 내용이 어떤 것인지 소개하겠습니다.

 나가사키의 몰락한 가문의 영애인 초초는 집안을 부양하기 위해 게이샤가 되었습니다. 이 때 나가사키에 주둔한 미군은 일본에서 법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편하게 지내기 위해 계약결혼을 하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해군 장교 핑커튼은 초초와 결혼하기로 합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에 초초는 현지처일 뿐, 미국에 돌아가서 미국인 여자와 결혼할 딴 생각을 품고 있었죠. 이를 모르는 초초는 개종까지 해 가면서 남편을 따르기로 합니다.

 결혼식 이후 얼마 되지 않아 핑커튼은 미국으로 돌아갔고, 재혼하라는 주변의 충고를 물리치고 혼자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던 초초는 미국 영사로부터 3년만에 남편이 돌아온다는 소식에 기뻐합니다만 역시나 핑커튼은 미국인 아내 케이트와 함께 나타납니다나쁜새키. 핑커튼은 초초가 남편 돌아온다는 소식에 집안을 예쁘게 꾸며놓은 것을 보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차마 혼자서 초초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자리를 피해쫄보새키 대신 영사와 케이트가 초초를 만납니다. 그리고 아이를 데려가겠다고 말하죠. 충격받은 초초는 30분만 달라고 하고 방으로 들어갑니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단도를 꺼낸 초초는 어린 아들에게 미국 국기와 인형을 주고 눈을 가리게 한 뒤 자결을 택합니다. 이 때 핑커튼이 일행과 함께 돌아오지만, 초초는 핑커튼에게 아이를 가리키면서 숨을 거둡니다.
순종적인 여성상, 그리고 자결과 관련한 오리엔탈리즘의 환상이 결합한 결과 당시부터 최근까지도 꽤 인기있었던 오페라이지만 현재는 이 플롯에 대한 문제점이 지적되면서 차츰 상연되는 비율이 줄고 있답니다.

고난주간 둘째날 쓴 것

크리스천의 본질

예루살렘 입성 후 둘째 날, 예수가 성전에 다시 올라온 것을 본 수많은 유대인들이 논쟁을 벌이거나 꼬투리를 잡으려고 다가왔다. 그러나 그 중에서 한 율법학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그 어떤 제사보다도 낫다”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는 낫지만 아는 것 만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알고 입으로 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나가려 애쓰는 것이다. 이것이 본질이다.
간혹 그런 삶에서 오는 덤, 예를 들어 착하게 산다는 칭찬을 듣거나, 생각 하지도 못한 좋은 일 혹은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을 경험하는 경우가 분명 있기는 하다. 그러나 세상은 잔혹하며, 이웃을 사랑하려 한 행동이 나에게 해로 돌아오는 때가 훨씬 많다. 그러나 이익과 손해는 우리의 결과물이 아니며 덤일 뿐이다. 사랑하는 삶이라는 과정 자체가 곧 크리스천으로서 본질을 추구한 결과가 된다. 그리고 완벽할 수 없는 인간이 완벽을 추구하는 삶은 당연히 실패로 끝나야 옳다. 괜히 성경에서 담대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크리스천은 호구라고 할 수 있겠다. 더군다나 이 내용이 기록된 시기는 유대인들이 말 그대로 대량학살을 당하던 시기다. 하나님을 믿으면 생명이 위험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 부모와 형제를 죽인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은 속터져 죽을 내용이다. 그렇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본질이다.

고난주간 첫째날 쓴 것

정의가 결여된 교회를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으신다.

강도는 자기 소굴에서 강도짓 하지 않는다. 강도들이 강도짓을 하고 나서 몸을 안전하게 피하는 곳이 소굴이다. 강도들이라 해도 그 소굴 안에서는 서로를 아껴줄 줄 안다.
예루살렘 입성 후 첫째날, 예수님은 성전 뜰에서 환전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상을 엎으시며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하신다. 이것은 그들의 행위가 잘못되어서 하신 행동은 아니다.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유대인들이 로마 황제의 얼굴이 들어간 돈을 쓸 수 없으므로 이스라엘의 화폐로 환전하는 것은 율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 행위가 아니라 그 안에 만연한 불의를 보셨다.
교회안에서 자기들끼리는 거룩하고 착한 사람인 것처럼 굴면서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다가도 밖에 나가서는 그 누구보다도 탐욕이 넘치고 음란하며 칼 안 든 강도와 다름없는 삶을 산다면 그야말로 자신이 머물던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셈이다.
우리가 개독교인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것은 지금 우리 시대의 기독교인들이 성전 밖에서 강도짓을 하고 성전 안에 들어와 약탈품을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정기적으로 가서 내 죄를 용서받는 곳이 아니라 정의가 강화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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